경주의 면적은 1,324.41㎢이며 동쪽을 향해 달려가면 바다가 닿는다. 경주는 넓디넓은 평야와 산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바다를 가진 신라 천년의 도시였다. 경주 도심을 지나 토함 터털을 통과하면 경주를 지키는 대왕임이 있다. 이 주변엔 기림사와 골굴사, 이견대, 주상절리 등의 여행의 코스들이 있다. 역사의 깊은 뜻을 느끼며 힐링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여행지이다.
'대왕 문무' 그는 누구인가?
혼란의 시대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의 연속을 지나온 문무! 승리의 역사를 만든 하나의 나라를 원했던 왕이다.
'법민' 이란 이름이 있었고 훗날 문무라 불렸다.
2009년 경주시 동부동에서 역사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비석이 발견되었다. 수돗가에서 발견된 이 돌은 많이 상해있었음에도 2500여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하단에 문무왕의 비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어있었다.
신라 왕실의 성씨였던 김씨의 내력이라든지 선대왕이었던 (태종) 무열왕 그리고 자신의 선조들의 위상, 업적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문무왕과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들도 비문에 함께 기록되어 있다. 당대의 기록이 있어 의미가 깊다 현재 비석은 경주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661년 태종 무열왕이 삼국을 미쳐 통일하지 못하고 죽게 되자 법민이 왕위를 계승했고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하게 되었다. 법민이 죽은 뒤에 얻은 시호가 문무이다.
문무는 문화와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위업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대 끊임없는 전생의 시대에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또한 한반도를 삼키려는 당나라와 무려 7년간 21번의 가까운 전쟁 끝에 승리를 이룬다.
현재 충남 서천의 갯벌이 질다는 뜻인 기벌포에서 동맹의 국가였던 당나라와 가장 큰 마지막 격전을 벌이게 된다.
당나라는 한나라와 더불어 중국의 원형을 만든 나라이고 상당히 강했다. 동서 남북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유목민적인 성향도 상당히 강했다. 기병도 강하고 농민병을 부병으로 대략 정규군을 50~60만을 편성할 수 있었다.
세계 대제국이었던 당나라를 기벌포에서 마침내 당나라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 이유는
신라의 유연한 외교술과 군사적 공세라고 할수있다.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을 포섭하여 혹은 회유를 해서 신라군으로 활용하는 등 병력자원관리에도 뛰어났었다. 676년에 통일을 하고 당나라를 신라가 물리치는 큰 전투가 육지에는 매소성, 바다에는 기벌포이다.
왕위에 오른 지 16년만에 통일의 과업을 이루게 된다.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문무왕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 있다. 가을이면 억새풀이 장관인 이곳은 경주 무장산이다. 사람이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골짜기에
마치 보물처럼 숨겨놓은 석탑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전쟁을 마친 문무왕이 투구와 병기를 묻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무기가 필요없는 국가가 되길 원했던 것이다. 문무왕이 전쟁의 승리 왕 이라기보다는 평화를 지연하고 미래의 새로운 시대를 제시한 왕이라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다.
당나라와 전쟁이 끝나고 5년 뒤 문무왕은 동해바다에 영원히 잠들었다.
경주 사천왕사지 유적지에는 문무왕릉비가 발견되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시대 화장을 택한 첫 번째 왕이다. 문무왕의 유언에는 자신의 무덤을 크게 만드느라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지 말라. 간략하게 화장을 하라. 백성들의 세금을 줄이고 오랜 전쟁으로 괴로워했던 백성들을 달래고 새 시대를 열었다고 본다. 백성들을 위해 선택한 유언이었다. 문무왕은 평소에 죽어서 용이 되고 싶다고 했다 한다. 용이 되어 왜란을 막고 신라를 죽어서도 지키려 했다. 오늘의 대왕암은 문무왕이 묻혀 용이 되어 지금도 한반도를 지키고 있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지은 감은사지가 대왕암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현재 절터는 사라지고 두 개의 3층 석탑만이 천년의 세월 속에 있다. 여기에서 보물이 발견되었다.
천년만에 나타난 감은사지 서탑 사리 장엄구, 장엄구에 사천왕의 모습은 동서남북의 수호신의 모습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서탑 수정 사리병, 동탑 사리장엄구 각종 장식물들은 예술작품으로 화려하고 섬세했다.
당시 신라사람들의 부처님의 생각을 신앙 양식을 잘 볼 수 있다 한다. 감은사지에는 문무왕을 위해 만든 통로가 있다.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들어진 바닥은 지진을 막고 동해와 가까운 감은사지 돌과 돌 사이일정힌 틈이 만들어져 있다.
용이 머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신라시대에는 지금보다 해수면이 높았다고 한다.
감은사지 금당터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신라에는 그만큼 용신이 강했었고 용이 나라를 지켜준다는 신앙이 보편적이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엔 감은사지 아래 용혈은 용이된 문무왕이 드나들게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감은사지 부근에는 물이 조금 남아있는 용이 머무는 용못이 있고 용의 흔적인 용지가 굉장히 크지만 현재는 일부분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곳 또한 동해바다와 연결되어있다.
신문왕은 문무대왕암이 잘 보이는 곳에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이견대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용이된 문무왕이 신령한 피리를 주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는 역사서에 짧게 기록되어있다.
국립경주 박물관에 옥피리가 그것이라 본다 한다.
문무왕은 통일정신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중요한 역사이다.
신라는 통일 후에 백제 , 고구려 지역을 9개의 주로 나누고 5 소경을 설치하여 행정구역의 편제에 평등을 노력한 것을 볼 수 있다. 융합정책이 신라 천년을 이어온 민족 정신일 것이다. 감포에 가면 신라의 중심에 서있는 문무대왕 유언이 담긴
'문무대왕 유조 비'가 있다.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정신을 후대에도 계승하게 하는 뜻이 담겨있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적 자산이 담겨있는 경주의 바다 '문무 대왕 수중릉'이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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