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선덕여왕과 별의 역사를 간직한 '첨성대'

경주여행

by 리쏭 2022. 3. 4. 10:00

본문

728x90
반응형
SMALL

 


신라 왕국에 우뚝 선 첨성대!
천문대일 가능성이 높다. 왕실을 위한 중요한 기능을 했던 중심 시설이었다. 위대한 여왕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만든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끝없는 논쟁은 아직도 하고 있지만 첨성대는 1400년을 넘게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경주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첨성대의 모습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주를 다녀가면 꼭 가보는 곳이 되었고 지금은 전 세계에서 빛나는 관광도시이기에 첨성대는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궁전이었던 반월성과 인근에 있으며 평지에 우뚝 서있는 첨성대는 사계절 우리를 지키듯이 버티고 있다. 현재 첨성대 주변은 경주시 전체가 문화재를 말해주듯 반월성, 동궁과 월지, 천마총. 경주 국립박물관, 분황사, 계림, 월정교, 교촌마을 너무나 많은 고적지와 함께 공존하여 자연풍경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지역으로 손꼽힌다.
단연코 두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첨성대이다.
밤에는 아름다운 불빛으로 첨성대의 자태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첨성대는 삼국유사에 신라 선덕여왕 때(재위 632~647) 건립된 것으로 1962년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m 높이의 돌 362개로 27단을 쌓아 만들었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 와 25단에서 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 자형 장대석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에는 판석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板石 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渾天義)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첨성대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아직 없다. 천문대란 주장이 가장 보편적이지만 왕권의 상징적인 건축물이자 재단이라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문헌 근거와 역사적 해석으로 아직도 논란이 있다고 한다.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통일신라뿐 아니라 고대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룬 왕으로 평가받는다.
재단이라는 설은 선덕여왕의 재임 때는 불교가 융성했고 불교의 영산을 (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 그대로 본떠 만들어서 불교적 재단이라는 말이다. 구조적으로 별을 관찰하는 건축물로는 굉장히 불편하다는 것이다. 첨성대의 위치도 문제라 한다. 보통 천문대는 높은 곳에 있고 궁궐의 한쪽에 있는데 첨성대는 넓은 평지에 있어 천문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라시대 처음 여자가 왕이 되어 반란이 많았고 선덕여왕이 죽을 때도 비담의 난이 있었듯
여왕이 다른 사람과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내세워야 했던 왕권의 회복에 중요한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강력한 왕권의 조성과 영을 위해 황룡사지의 구층 목탑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별을 본다는 첨성대란 이름이 여왕의 신성시를 나타내는 다른 뜻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첨성대의 모습이 여성인 여왕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설은 역사적 해석을 바탕으로 단순히 별을 관측하는 것이 아닌 포괄적으로 본다.
별을 본다는 것은 과학적인 관점에서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나 개인 여러 가지 사람의 일생이나 국가의 장래와 연결시켜서 하늘을 보았다는 것이다. 점술적인 요인도 아주 없다고 볼 수가 없다. 농경사회의 주였던 그 당시에는 기상과 기후관측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했다. 왕이 직접 관리를 했던 것이다. 통치와 주술의 권한을 모두 가진 왕의 시대였기에 매일 뜨는 별의 관측은 하루 동안의 별의 위치로 시간을 알고 계절을 알 수 있고 천문현상이 일어나는 자체가 무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안위와 직결된다고 보았다.
과거 첨성대는 삼국사기에(317~371) 점성대로 기록된 것이 있는데 왕이 죽을 때 점성대에서 관측한 별자리를 보고 능률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첨성대의 존재가 왕에게 특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위치도 왕이 있던 반월성 가까이 있고 이상 현상이 있을 때 왕에게 바로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런 관점이면 당시 천문대란 별을 관측하는 곳이 아닌 별의 움직임 하늘의 현상을 관측하는 곳이었다. 낮은 평야에 있는 첨성대가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첨성대 근처에는 시야를 차단할 수 있는 산이나 혹은 큰 나무도 없다. 전 하늘을 쉽게 사방을 관측하기 좋은 입지에 있는 것은 확연하다.
첨성대는 크게 세 부분이다. 사각형 기단인 밑받침, 돌을 원통형으로 쌓아 올린 원통 그리고 꼭대기에 쌓아올린 정자석이다. 땅속에는 지진의 영향을 받은 경주의 지형상 깊이 판곳부터 돌로 쌓아 평지를 만들고 흙과돌로 채우며 만들어져 있다. 지진에도 버틸 수 있는 설계를 해 놓은 것이다. 몸통의 27단은 달의 공전 주기와 27대 선덕여왕을 상하부 기단을 합한 31단은 양력 1달 남창 구를 기준으로 위아래 단은 12달 24절기를 돌의 수는 365개로 일 년을 뜻한다는 것이다.
수학적 또는 심벌 여러 가지 수의 얽힌 이야기를 보면은 예사로운 건축물임은 분명하다.


첨성대는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에 총 8개의 비 녀석이 설치되어있다. 이는 내진성능을 우수하게 보여주며 최상단에 설치된 정자석이 서로 맞물려 있어 좌우 흔들림을 억제해서 지진에도 잘 견딜 수 있게 하였다.
남창구(중앙에 가로세로 1m 크기의 구멍) 아래까지 채워진 흙은 몸통을 일체로 움직이게 하고 내부의 거친 벽은 마찰력을 증가시켜 더 강한 구조물이 되게 한다.
사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기틀을 완성한 국가다. 하지만 신라가 남긴 수많은 유적은 지금까지 고대사회를 대표하는 문화이자 사상이다. 통일을 바탕으로 백제나 고려의 외국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고 삼국문화를 융합하고 그대로 발전시킨 것이다.
1400년을 버터온 건축물은 사실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기적을 보고 있는 것이고 그 기적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고대 건축물 중 그 모습을 유일하게 그대로 간직해온 첨성대는 앞으로도 살아 우뚝 서 있길 바란다.

반응형
LIST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