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구황동 황룡사지에 있던 목탑이다. 고려시대 몽골 침입 때 불에 타 없어졌고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에 창건하여 당대 최고 높이의 9층 목탑이 조영 되기까지 4대 왕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된 동양 최대 규모의 호국사찰이다.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목탑의 창건의 역사는 불가능해 보였던 신라는 통일이라는 꿈을 이룬다. 그 꿈을 이뤄낸 선덕여왕의 집념, 그 위대한 여정이 황룡사 9층 목탑에 고스란히 남겨있다. 고려시대 고종 25년(1238년) 몽골 침입에 불타 사라졌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황룡사지의 터의 '심초석'들은 엄청났던 황룡사 9층 목탑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선덕 여왕(643년)이 다스리던 당시의 신라는 밖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 안으로는 여왕의 통치에 맞서는 반란 등 여러 가지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불교 신앙의 힘으로 왕권과 신라를 튼튼히 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그중의 하나가 황룡사에 커다란 목탑을 세우는 일이었다.
정치적인 의도와 종교적인 신성성을 교묘하게 결합시키는데 의미가 있었다. 정치적 의도란 실추된 여왕의 권위 그래서 이웃나라에 침약을 받는다는 위엄이 없다는 그것을 거대한 탑을 통해 그 위엄을 확보하려는 것에 그 속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환하여 종교적인 신성성을 확보했다.
황룡사는 신라의 제24대 임금인 진흥왕 14년 (553년) 때 세운 절로 '신라의 보물'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처음에 궁궐을 지으려고 했는데 궁터에 황룡이 나타나자 이를 심상치 않게 여겨 공사를 중지시키고 절을 짓게 하여 17년 만에 완성된 신라시대의 사찰이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과 금 3만 분으로 석사 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장육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미터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 (584년) 금당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황룡사는 신라와 고려의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황룡사의 거대한 종 역시 몽골이 침임 하였을 때 없어진 것으로 전한다.
황룡사의 가람배치는 처음 늪지대를 메워서 창건될 당시에는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 탑 1 금당식 배치였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이후 장육존상과 9층 목탑 등이 만들어지고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지어져 1 탑 3 금당식으로 변화한 것이라 한다. 179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 풍탁, 금동귀걸이, 각종 우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cm에 이르는 치미는 당시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황룡사에 걸맞게 황룡사 9층 목탑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 대사의 요청으로 세워졌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 대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당나라에서 수행하던 중에 한 신인을 만났는데 그 신인이 신라로 돌아가 9층의 불탑을 세우면 나라가 편안해질 것이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이에 지장 대사가 선덕 여왕에게 청하여 탑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탑의 높이는 80미터에 달하는 매우 거대한 규모로 지었다. 현재 아파트 30층 높이라면 이해가 쉽게 된다. 그 당시로는 참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9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9개의 층은 신라의 주변의 아홉 나라를 상징했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탐라, 5층은 응유, 인데 응유는 백제이다.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진, 9층은 예맥, 인데 예맥은 학자들은 고구려를 칭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세우려고 탑을 세웠다면 탑에는 불심을 따로 모으는 각종 상징물들이 배치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9층 탑의 탑신에 99개의 소석 탑이 모셔져 있다
9층 목탑은 내부에 계단이 있어 한층 한층 올라갈 수 있고 9층까지 올라가서 난간에서 전 시가지를 다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이 있었을 때 군사적 의미로도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의 발전을 목적으로 지었지만 정작 탑의 건설은 백제의 장인인 아비지에(645년 )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삼국 가운데 백제의 건축 기술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선덕 여왕과 신라의 관료들이 백제 기술자에게 목탑 건설을 맡긴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비 지는 탑을 건설하는 도중에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고 탑건설을 멈추기도 했다. 하지만 꿈에 한 스님과 힘센 장사가 목탑 기둥을 세우는 모습을 본 다음에 모든 것이 부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타고 3일을 목탑의 잿더미들이 날아다녔다고 기록에 있다 한다.
나라를 상징했던 황룡사와 9층 목탑은 아직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목탑의 외부 복원이 다 되어 현재는 모형만이 세워져 있지만 그 모형만으로도 거대함과 지진에 대비한 건축기법 등은 세계에서 주목을 하고 있다. 앞으로로 내부와 탑으로 인한 생활들을 알아가고 있다고 하니 황룡사와 9층 목탑의
역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황룡사터에는 황룡사 9층 목탑 박물관이 있다. 조경도 아름답게 꾸며놓아서 봄철 되면 청보리를 심어 넓은 땅을 평화롭기까지 하다. 박물관에 가면 모형도 볼 수 있고 건축방식과 발굴 현장과 발굴된 유물정보들도 있다. 또한 경주 보문 관광지에 가면 황룡원이라고 9층 목탑을 재현해 놓은 건축물이 있다 실제 모습과 아주 흡사하게 복원된건물이다.
봄이 되면 벚꽃속의 황룡사 9층 목탑을 감상해 볼 수 있다. 경주여행에서 실제 황룡사터와 박물관 그리고 보문의 황룡원을 꼭 한번 둘러보면 많은 이해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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